‘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해 첫 시집 ‘어떤 개인 날’을 펴낸 게 1961년. 66년의 시력(詩歷)의 고희를 바라보는 황동규 시인은 시간의 흐름 속에 같이 흘러가고 있는 일상의 삶을 작품에 녹여내며 시인의 펜이 지나간 자리는 아주 담담하게 흐르는 세월을 마주하고, 삶을 삶으로써 감당하고 깨달음을 얻는 공감과 감동이 마음을 자꾸 간지럽힌다.
대한민국 시단의 대표적인 거목 황동규 시인이 우리 동작구에서 30년 넘게 함께 생활하고, 산책하고, 지금까지도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기자의 무심함에 반성하며 86세 고령의 황동규 시인과의 귀하고 가슴 설레는 자리를 어렵게 만들었다.
마을버스 차창 밖으로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는 멋쟁이 신사가 보인다. 딱 봐도 시인이시구나 하며 서둘러 버스에서 내려 반갑게 뛰어가 인사를 건넸다. 콩닥콩닥 황 시인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가을비 솔솔 내리던 10월 14일 오후 사당3동에서 시작됐다. 흔쾌히 시인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신의 방을 내어 준 정해영 사당3동장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기자 안녕하세요? 동작구민들에게 인사 한 말씀 부탁드려요.
시인 내가 지난 20년 가까이 사당3동 얘기를 많이 썼잖아요. 현충원 얘기하고, 서달산 얘기하면 사당3동 아니겠어요?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도 하고, 서울 안에 강남구, 강서구, 영등포, 성북구 등등 많은 지역 문화원, 대구, 춘천 등 지방 도시, 도서관 등에서도 강의를 했는데 동작구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내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한 적도 없지만 문화에 대한 관심이 동작구는 조금 활발했으면 하는 바람을 먼저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동작구는 넓은 의미에서 자라는 구예요. 아마 상당한 의미에서도 그 중심의 역할을 하나를 담당할 수 있는 구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처음에 왔을 때하고는 아주 달라요. 처음에 왔을 때는 포장도 안 돼 있고 여름에는 장화를 신고 다녀야 했어요. 그런데 많이 달라졌어요. 아파트도 많이 생기고, 다세대 주택 도 생기고, 서울 시내에서 가까운 데 있는 빌드타운이 되는 거죠. 동작구민들이 자긍심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기자 선생님의 유년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시인 한국전쟁이 나고 1951년 1ㆍ4후퇴 때 대구로 피난을 갔어요. 어려운 살림에 생활도 곤궁해졌는데 살림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신문팔이를 시작했어요. 그 다음엔 동생을 데리고 좌판을 하며 껌, 담배, 초콜릿 같은 것을 팔았는데 경찰한테 좌판을 몇 번 걷어 차였던 기억이 나기도 해요. 대구에서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상당히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부친이 소설가이다 보니 직장이 없었고, 원고도 팔수가 없었죠.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2살 아래 동생과 함께 초등학교 6학년짜리가 엉터리 영어로 미군 부대에서 물건을 사서 광복동에 있는 상점에 갖다 팔았어요. 그 돈을 집안 살림에 보태곤 했죠.
당시 거기에는 길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전차가 있었는데 전차표 넉 장 값이 아까워서 미군부대에 정차하는 트럭에 몰래 타고 다녔어요. 그런데 트럭 기사들은 싫어했어요. 공짜로 타니까요. 한 번은 동생을 태우고 내가 타려고 하는데 갑자기 속력을 내는 거예요. 그러면 못 올라가요. 서대신동에서 서면까지 매달려 갔어요. 몇 번이고 손을 놓고 싶었어요. 놓으면 죽거나 불구가 되었을 거예요. 그 이후에 1년 동안은 꿈에 자꾸 나오는 거예요.
생각을 안 하려고 했죠. 몇 년 지나니까 그것을 견뎠는데 무엇을 못 견딜까 하는 힘이 생겼어요. 우리 부모님은 모르고 돌아가셨어요. 동생이랑 이야기 하지 말자고 했죠. 동생은 위에서 형아, 형아 하면서 울고 고등학교 2학년 되니까 그것이 힘이 되더라고요. <즐거운 편지>에서 보면 ‘사소한 일일 것이나’라는 표현이 있는데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어떻게 사랑을 사소하다고 표현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 때마다 짝사랑하던 연상의 여인을 위해 쓴 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코로나시기에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깨달은 것이 사랑을 사소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그 고통을 이겨낸 그 기억이 ‘사소함’이라는 단어가 나오게 된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새로 닥치는 아픔과 고통이 덮여지고 치유가 되는 것은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리고 싶었던 만큼 힘들고 아팠던 그 때 그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던 거죠.
기자 부모님께서는 선생님께서 시인이 되시는데 반대를 하시진 않으셨나요?
시인 어머니께서는 제가 문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 굉장히 반대하셨어요. 아버지가 글 쓴다고 고생하는 것을 곁에서 다 보셨으니 아들만큼은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셨던 거겠죠. 부모님께서는 제가 의과대학이나 법과대학을 가기를 원하셨어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법대나 의대에 응시하면 당시 돈 20만 환인가를 주겠다고 하실 정도였어요. 아버지께서는 제가 문학 쪽으로 나가는 데 대해 완강하게 반대하신 건 아니었어요. 물론 탐탁하게 생각하지도 않으셨죠. 아마 ‘나같이 고생하지 말고 잘 살아라’하는 생각이셨던 것 같아요. 결국 아버지께서는 “후회하지 않을 일은 뭐든 해도 좋다”라고 말씀하셨죠. 물론, 속마음은 어떠셨을지 모르지만요.
기자 선생님이 추억하는 부모님은?
시인 아버지(소설가 황순원)는 문학밖에 모르시는 분이었고, 어머니는 생활력이 상당히 강한 분이셨어요. 우리 어머니는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아버지께서 작품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야말로 그림자 내조를 펼치셨지요.
소설가 황순원의 아들 시인 황동규의 관계에 대해 종종 질문들을 해요. 그런데 이런 것이 있어요. 세계에서 영화, 음악, 미술은 아버지와 아들이 다 잘할 수 있어요. 바흐가 유명한 음악가이지만 아들 세 명은 바흐가 작고한 다음에 더 유명했어요. 플랑드르 지방, 네덜란드와 벨기에 일부 지방에서는 3대가 다 유명한 화가들도 있어요. 그런데 문학은 2대가 유명한 문학가가 하나도 없어요. 음악과 미술하고는 달라요. 문학은 느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렸을 때 가정 체험이 제일 중요한데 아버지가 체험을 선점해 버리면 아들이 할 일이 없어요. 하나 예외로 <몬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를 쓴 아버지 뒤마, 베르디가 <라 트라비아타>로 작곡한 <춘희>를 쓴 아들 뒤마예요. 아들 뒤마는 당시 제일 유명한 극작가였지요. 그런데 아들 뒤마는 서자였어요.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에 체험을 선점당할 염려가 없었죠.
이따금 강연 갈 때마다 아버지께 받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요. 함께 살았으니 받은 것도 분명히 있죠. 아버지는 일생동안 문학 일변도죠. 제가 감명을 받은 것은 새벽 네 시쯤 되면 소반을 놓고 앉으셔서 글을 쓰셨어요. 그렇지만 아버지처럼 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아버지의 문학정신과는 정 반대가 되려고 노력했어요. 아버지는 문학책을 주로 읽으셨고, 저는 역사학, 철학, 사회학 책을 읽었어요.
내가 음대를 가려고 했었잖아요.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베토벤 음악을 듣고 휘파람으로 불었어요. 친구는 음을 정확하게 소리 내 부는데 저는 정확하게 불지를 못했어요. 제가 아주 약간 발성 음치였거든요. 작곡가가 되는 데 발성 음치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던 거죠. 바흐의 골든 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그린골드도 나보다 더 음치인 것 같아요. 나는 절대음감이 없어요. 상대 음감은 있어요. 딸(황시내 작가)은 절대 음감이 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수업 끝나면 가방 둘러메고 명동에 있던 ‘르네상스’나 인사동의 ‘돌체’ 등과 같은 음악다방 혹은 음악실에서 2~3시간 듣고 집에 오곤 했어요. 집에서는 영어로 된 화성학으로 공부도 했어요. 그 당시 각설이 타령을 변주시켜 3악장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죠. 피아노를 잘 쳤다면 아마도...그래서 아버지 이야기는 잘 안하려고 해요.
시는 소설과 다르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중요한 경험은 아버지께서 다 갖고 계신데 내가 부스러기를 주워서는 안 되죠. 아버지를 넘지 않으면 내가 있을 이유가 없으니 그래서 내가 즐거운 편지 쓸 때부터 난 문학을 하려고 했는데 음악하고 제일 가까운 것이 시라고 생각하고 시를 택한 거죠. 예술가는 방황할 수도 있어요. 혹시 말이죠, 아버지하고 비슷한 길을 걸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버지하고 싸워야 해요. 그건 필요한 거예요. 안 싸우면 설 자리가 없어요.
기자 예술가의 방황은 필요할 것 같아요. 여행을 자주 다니셨는데 그런 이유도 있을까요?
시인 여행 자체를 좋아해요. 대학교수라는 직업은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을 낼 수가 있어요. 그 대신 강의 준비를 제대로 해야지요. 더군다나 서울대학 같은 데서는 학생들 질이 높으니까 학생들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준비만 하면 나머지 시간은 내 것이니까 신문사 기자나 그런 것 하고는 다르죠. 그 질문 같은 거 하게 되면 제대로 할 수 있게 준비를 제대로 하면 나머지 시간은 내 거니까요.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아마 요새는 모르겠어요. 그때는 아마 내 나이 또래에서는 우리나라 여행 외국까지 포함해서 유럽까지 다닌 사람은 찾기 어려울 거예요. 군청 소재지치고 한 번도 안 가본 데는 없을 거예요. 제주도까지 포함해서요. 제일 기억에 남는 곳이나 장소도 한 두 곳이 아니라 손에 꼽을 수가 없어요.
기자 얼마 전에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어요.
시인 아주 축하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어요. 그건 진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번역가가 번역한 거예요. 제대로 한 번역이지요. 나도 그 동안에 독일어로 된 작품 <풍장>을 두 권 냈고, 나머지 7권쯤 번역이 됐어요. 영어로도 6권 정도, 스페인어도1권, 프랑스어도 1권 그런데 번역가들은 다 한국인 이예요. 시나 소설의 미비한 점을 모국어를 사용하는 번역가와 외국어를 하는 한국인 번역가하고는 차이가 있어요. 내 작품 중에 진짜 자기나라 모국어로 번역된 건 몽골어로 번역된 것이 있어요. 몽고사람이 우리나라 몽골대사관에 2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면서 우리나라 말을 배워서 번역을 했는데 나는 몽골어를 모르니까 번역된 책을 받았는데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읽을 수도 없고...한강 작가는 많이 축하하고 축하해야 해요.
기자 올해 2020년 펴낸 ‘오늘 하루만이라도’ 이후 4년 만에 신작 시집 ‘봄비를 맞다’(문학과지성사)를 출간하셨어요. 이수가 되시는 88세 되시는 내후년에 또 한권의 시집이 나올까요?
시인 가봐야 알죠. 하여간 죽을 때까지 시를 쓰고 있겠지만 이번에 시집 내고도 시가 한 대여섯 편 발표됐는데 아직 힘이 줄지 않았다고들 해요. 힘이 줄면 그만 써야지요. 힘이 없는데 뭣 하러 만년의 작품을 남기겠어. 그건 알 수 없어요. 내가 3~4년만 젊은데 그래도 책이 한 권도 나올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집이 나올지 안 나올지 알 수가 없어요.
기자 사당동에 오셔서 좋아하는 산책길도 있었지만 또 다른 기분 좋은 기억이나 일화가 있으실까요?
시인 지금 07번 마을버스 종점이 있는데 예전에는 16번 마을버스 종점이기도 했어요. 당시 막차가 12시에 떠났어요. 어느 날 비가 오다가 개었어요. 서울 하늘은 먼지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는데 그 날은 별이 보였어요. 내가 아파트에서 한정거장 걸어 올라갔는데 어떤 키 큰 여자 하나가 허리는 굽었던 것으로 생각하는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하늘이 잘 보이는 버스 정류장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리온성좌가 보였어요. 내가 그 별자리를 좋아하는데 요샌 못 보고 살아요. 그런데 그 여자가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 그만 죽어버릴 거야 그러는데 그게 남편인지 딸인지 아들인지 모르겠어요. 그 옆에 서 있다가 이것저것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너무 깨끗한 걸 생각하지 말고 뭘 해라. 혜성도 사실은 먼지지만 얼마나 황홀하냐!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옆에서 진짜 누군가를 정말 한없이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는 그것이 시 쓴 것처럼 시 쓰는 시가 그냥 그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삶이 새어 나오는 시를 쓰는데 사당3동처럼 좋은 데가 없었어요. 지금은 많이 나빠졌지만.
내가 부모님과 함께 살려고 서초구 반포동에서 이사 왔는데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부모님은 4층, 우리는 8층에서 살았어요. 내가 부모를 조금은 모신 셈인데 서초구에 살았으면 지금만큼 뭔가 살면서 나오는 시가 좀 적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어요. 처음에는 장화가 없으면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진흙탕이 장난이 아니었어요.
기자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시인 사실은 동작구의 중심이 상도1동이었어요. 예전에 아내 집도 상도1동이었어요. 사당3동은 빈터였죠. 반포아파트가 생기기 전이니까요. 아내가 대학원을 영문과로 왔어요. 군대를 다녀왔으니 아내가 후배가 되어 있었죠. 군대 갔다 오니까 아내는 3년 후배고, 당시 군대가 33개월이었으니까요. 참 괜찮았어요. 음악도 좋아하고 영문과니까 문학도 좋아했을 거고 그래서 사귀기 시작했어요. 한 1년쯤 후에 약혼을 했던 것 같아요. 어디가 특별히 좋았다기 보다 그냥 다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데 결혼은 동생이 먼저 했어요. 내가 미국에든버러 대학 디플로마 과정 중이었어요. 아내도 한성대학교 영문과 교수였어요.
▲ 올해 출간한 황동규 시인의 시집 봄비를 맞다(문학과지성 시인선 604,2024)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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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나이가 든다는 것과 나이 든 삶에 대한 얘기를 해주신다면?
시인 난 사실 75세 때까지는 한 번도 늙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살았어요. 5년 전인가 문화일보와 파워인터뷰 할 때 한 이야기인데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몸이 불편해졌다고 생각해요. 몸이 불편해지면 단 하나 산문이든 시든 글 쓰는 일만 남았다라고 생각하고 삶의 의미가 되는 거죠. 그리고 나는 술을 좋아하니까 그저 후배들하고 같이 지금도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 정류장에서 멀지만 않으면 저녁 때 나가서 한잔 하고 와요. 술은 사람하고 술집하고 맞으면 되요. 물론 아주 비싼 위스키라면 좋지만 그건 자주 먹게 되지 않고 그러니까 위스키든 와인이든 소주든 맥주든 때때로 막걸리까지 만나는 사람들하고 안주하고 맞아야 돼요. 술자리에 3대 요소가 같이 마시는 사람, 술, 안주 그것이 3대 요소예요. 제일 중요한 것은 만나서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제일 중요해요
기자 선생님께 ‘시’란 무엇인가요? 앞으로의 작품 활동 계획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세요.
시인 문학은 말이죠, 미술하고 음악하고 달리 느낌에 먼저 호응을 안 해요. 예전에 경남 창원인가 강연 초청을 받아 갔는데 1부는 음악, 2부는 문학 강연으로 되어 있었어요. 1부에서는 가라오케 음악을 틀고 노래를 부르는데 다 알려진 시를 가사로 한 노래들이에요. 잘 부르더라고요. 1부 마지막이 정 모 시인이 쓴 ‘나는 사회에 술을 여러 번 샀는데 사회는 나한테 술 한 잔은 사지 않았다’인데 신나니까 청중이 발을 구르고 나도 그럴 뻔했어요. 그리고 사회자가 바로 이어서 “이제 황동규 선생의 문학 강연이 있겠습니다”하는데 강연이 되겠어요? 10분 후에 하겠다고 했죠.
음악하고 문학은 좀 달라요. 음악이나 미술은 느낌이 거의 다이고, 역사나 철학은 생각이 거의 다예요. 문학은 그 가운데 있어요. 느낌과 생각이 같이 있어야 되는 거죠. 시가 음악하고 합치게 되면 가사가 아닌 음악에 먼저 반응하고, 시화전의 경우도 그림이 좋을수록 시는 읽혀지지 않아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예로 들면 가사보다는 음악이 더 유명하죠. 시집 겨울나그네 강의는 없어요. 위대한 음악이지요. 미국이나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외국에서는 시 낭송을 할 때 음악을 깔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 시낭송가의 목소리로 시를 감상하게 하죠. 우리나라는 특이해요. 시 낭송에 꼭 음악을 넣어요. 그렇게 되면 시가 죽고 음악이 사는 거죠. 시는 시청각이 다 포함되어야 해요. 읽으면서, 느끼면서 동시에 생각을 해야 해서 대한민국예술원 개원 70주년 기념행사 때 내 순서에는 연주를 못하게 했어요. 왜 음악을 넣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음악과 같이 있으면 좋지 않은 시가 좋아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시든 나쁜 시든 현대시는 시청각에 생각이 포함되어야 해요. 느낌만 주려고 하지 말고... 앞으로 동작구에서도 시낭송에 할 때는 음악을 배제하고 시에만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전하고 싶어요.
기자 선생님과 같은 문학의 길을 가는 젊은 작가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은?
시인 내가 도와줄 수 있는 한 도와줄 거예요.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잖아요. 몇 년 전만 해도 동작구에서 손을 내밀면 시를 고쳐주는 일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금년 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이제는 내가 그거 할 여력이 없다고 봐야죠. 그 전까지는 시인들과 대화하면서 조언을 해 줄 수 있었는데... 세상의 일은 대게 갈 수 있는 일은 힘든 일이에요. 쉬운 일처럼 갈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봐야 해요. 모든 것은 좀 힘이 드는 것이 가치가 있는 거예요. 시나 문학이나 미술이나 음악이나 아마 팝까지 포함해서 정말 힘들게 정신없이 연습한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견뎌내지, 자질만 가지고는 안돼요. 케이팝 방탄소년단을 보면 알 수 있죠. 7명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죽을 만큼 연습했으니 세계에 우뚝 서는 거죠. 힘든 일이 가치가 있어요. 대게 쉬운 일은 가치가 없어요. 무엇이든지 이겨내면 힘이 되요. 이기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는 거죠.
기자 선생님의 하루 일과는?
시인 여름에는 6시 조금 지나서 깨고 겨울에는 6시 반이 좀 지나면 깨요. 아침 일찍 깨는 편이에요. 깨면 안약을 넣어요. 아침을 먹고 허리 아픈 약도 먹어요. 허리는 협착증 때문에 주사도 맞고 있죠. 그리고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작업에 꼭 들어가요. 일주일이면 엿새는 한 50분에서 1시간 동안 내 산문이나 시를 쓰기도 하고 고치기도 해요. 하루에 1시간은 그걸로 보내요. 어떨 때는 조금 더 보낼 수도 있지만...옛날에는 산책을 했는데 요즘은 한 번 산책하려면 큰마음을 먹고 가야해요. 집에 러닝머신이 있는데 걷는 속도를 맞춰서 한 5분 정도 걸어요. 걷지 않으면 걸을 수가 없어요. 신문도 읽고, 저녁에 텔레비전도 조금 봐요. 그러가 보면 하루가 가는 거죠.
지금도 매일 한 시간 정도는 나의 문학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거죠. 독서도 1시간 정도 해요. 눈도 나빠졌고 아니 뭐 책은 밝은 데서 보는 거니까 날이 흐리면 불을 켜면 되고 세월 앞에서 다 불편해졌지만 뭐 그래도 아직도 글 쓰는 데서 의미를 발견하고 후배들과 술도 마시고, 주로 후배들이지 친구들은 거의 다 죽었으니까. 같이 술 마시는 친구는 거의 다 죽었어요.
기자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시인 새로 발견하고 새로 깨닫고 그런 것이 들어 있어요. 이번 시집 봄비를 맞다 에서도 보면 서달산을 오르다보면 완전히 죽은 나무가 있었어요. 난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3년 전인가 올라갔다가 비가 내려서 내려오는데 잎을 피우고 있잖아요. 잎눈이 올라오는데 그걸 보고 나도 비를 그대로 맞고 움직이지 못했어요. 옷은 젖었지만 그 때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라는 그런 내용들이 몇 군데 담겨 있을 거예요. 살다 보면 과거에 모르던 걸 깨닫게 된 것도 있고, 내가 꽤 오래 살았는데도 2~3년 전만 해도 좀 걷기가 좋았죠. 내가 사당3동에 살면서 중요한 것을 말한다면 시를 얻은 것이 그 중에 하나예요. 봄비를 맞다 라든가 이렇게 그건 사당3동에 살지 않았으면 절대로 쓸 수 없었겠죠.
시인은 2시간 가까운 인터뷰 동안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는 게 불편했을 법한데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자가 준비한 질문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건넸다. 삶을 슬기롭게 살아가며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느끼게 했다. 비록 걸음이 조금 느려도, 눈이 조금 나빠도, 귀가 조금 어두워도 그 또한 시인에게는 살짝 불편한 것일 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매 질문에 웃으며 화답해 준 황동규 시인과의 아쉽지만 귀한 만남이 감사한 시간이었다.(기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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