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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의 기억을 따라 만나는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
항일투쟁 숨은 주역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성주
기사입력  2021/02/23 [14:00] 최종편집    노정애 기자
▲ 항일투쟁 숨은 주역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성주

‘할아버지의 삶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채 묻혀 있는 것이 늘 안타까웠어요! 제가 아니더라도 역사학자들이 찾아서 밝혀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이미 기록된 역사를 바로 세우기는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일제치하에서 무장독립항쟁의 승리로 독립군과 민족에게 큰 힘이 되어 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기록에서는 주로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의 이름이 거론된다. 그러나 그 이름 뒤에 항일투쟁의 숨은 주역인 ‘최운산’(1885~1945) 장군이 있다. 만주 일대에 흩어져 투쟁하던 독립군들이 1920년 대한북로독군부라는 독립군 사령부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승전의 기반을 마련한 이가 바로 최운산 장군이다.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듯 입춘의 문턱에서 하얀 눈이 내려 쌓인 2월 4일, 동작구를 벗어나 은평구를 찾은 기자는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됐다. 역사라는 것이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묻히기도, 두드러지기도 한다. 후세에 전해지는 역사는 그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수집, 검토, 고증 등 오랜 시간 정말 부지런해야지 제대로 기록될 수 있다. 기자는 두드러진 역사 속에 숨겨져 사실과 다르게 알려진 봉오동 전투에 대해 오랫동안 언론운동을 해 온 시민운동가이자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 준 고 최운산 장군의 손녀인 최성주 선생을 만나 이미 기록된 역사에 진실을 더하기 위해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봉오동으로 한걸음씩 걸어가 보았다. 

 

▲ 봉오동 산길은 평소 아무도 다니지 못하도록 대형 대문이 길을 막고 있다. 봉오동 수남촌 라철룡 촌장이 열쇠로 문을 열고 있다.(2016.10.9)

 

기: 영화 「봉오동 전투」가 개봉하면서 우리 독립군의 활동이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어떤가? 

최: 할아버지께서 올려놓은 항일투쟁의 역사의 방향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지금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단지 후손의 마음이 아니라 100년 후를 살아가는 후세대로 매순간 목숨을 걸어야하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두려움 없이 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나라 잃은 젊은이의 분노와 의기를 고귀한 삶으로 승화시키셨고, 온 일생을 통해 단 한순간도 조국 독립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할아버지와 최운산 장군의 동지들이 이루셨던 만주의 참 역사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길 바란다. 

 

현재는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다. 봉오동 전투가 지난 해 100년을 맞았는데 영화나 책으로 소개되고 있는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소규모 게릴라 독립군이 완전무장한 일본 군대를 기적적으로 무찌른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는 잘 훈련된 독립군이 아주 체계적으로 준비해 큰 승리를 거둔 ‘독립전쟁’이었다.

 

▲ 최운산장군 기념사업회 창립식(2016.7.4)   

 

저는 봉오동 전투를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지휘한 故 최운산 장군의 손녀로,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께 봉오동전투의 진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할머니로부터 들은 내용을 증명하기 위한 사료도 찾아냈고, 직접 봉오동에 방문해 전투 현장을 확인하고 기존 역사서술의 잘못된 점을 짚어내기도 했다. 역사학자들을 만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사료들을 전해주기도 했다. 2016년에 <최운산장군 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역사를 바로 쓰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이라는 책도 펴냈다.

 

학자들이 학술적으로 정리한 역사를 뒤집는 일은 앞으로도 쉽지 않다. 앞으로도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료들을 제시하고, 독립군들의 진짜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봉오동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재조명해 독립군이 꿈꿨던 세상을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혀도 역사의 한 줄기가 조금이라도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할아버지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생각하며 최운산 장군 손주답게 살고 싶다.

 

기: 봉오동 전투는 어떤 전투인가? 

최: 봉오동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3.1운동이 빠질 수 없다. 1919년 3월 1일 민족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망을 담고 서울에서 시작한 만세시위는 국내를 넘어 간도와 연해주로 계속 이어졌다. 1919년 5월 15일에 조선헌병대사령부가 기록한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만세시위 현장 집계 사료만 봐도 알 수 있다. 조선인이 적었던 서간도에서는 몇 십 명에서 몇 백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이어갔고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던 북간도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수천 명씩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러나 3.1운동이 일어난지 100년이 넘었지만 역사학계는 만주 전역에서 몇 달 동안 수십 곳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기록을 제대로 전해주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일제가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 1919년 당시 일제 헌병사령부에서 파악한 간도와 노령에서의 만세시위 소요요도(서간도에서 북간도, 연해주 전역에 걸쳐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일제 문서)  

 

이 각각의 지역에 대한 일제의 보고서가 존재한다. 참석자들이 몇 명인지, 주동자는 누구인지, 기념식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발언의 내용은 무엇인지 자세하게 보고가 되었다. 이 중 최운산 장군 형제들이 주도한 왕청현 백초구(1,500명) 시위에 대해서는 내용을 확인했다.

 

봉오동 전투는 3.1운동 다음 해인 1920년 대한민국 독립군이 중국 봉오동 지역에서 최초로 일본 정예군을 격파한 승리의 역사다. 한일합병조약 이전 우리 민족은 한반도 지배의 야욕을 품은 일본을 상대로 의병을 조직해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일제의 무차별적인 학살과 탄압이 극에 달하자 우리 의병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 일대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을 맺으며 일제강점기로 본격적으로 들어간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는 우리 독립군이 초라한 복장을 입고, 수적 열세에 몰린 상태에서 힘겹게 일본군을 격퇴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부분은 역사적 진실과 거리가 있다. 

 

▲ 최성주 선생이 봉오동 전투 현장 답사시 찍은 봉오동 저수지, 훈련현장, 참호모습과 봉오동 전투현장 아래 수남촌 주민이 산에서 습득한 일본도와 철모, 수류탄 등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청현 봉오동에서 독립군 통합 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가 일본군 정규군을 구성된 월강 토벌군을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전투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157명, 부상자는 200여명이었던 데 반해 독립군은 4명이 숨지고 부상자가 약간 발생한 데 불과했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실제의 전과는 훨씬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할아버지인 최운산 장군이 1908년부터 건설한 봉오동에 독립군기지를 완성했다. 그 중 본부는 9,900㎡(3,000평) 되는 평지에 두께 1m의 토성이 방어벽을 치고 있었다. 연병장과 대형 막사 3동은 토성 바깥 상촌에 있었다. 

 

이강훈, 『무장독립운동사』 (서문당, 1975)에 봉오동 지역에 대한 기록을 보면 ‘왕청현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가량 떨어진 산간이다. 장백산의 지맥인 고려령의 험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꾸불꾸불 갈지자 형으로 장장 20리를 뻗은 계곡 지대에 1백 수십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다. 이 부락에는 최명록 3형제가 있어서 그들의 지도 밑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재류동포의 생활과 기타 모든 면에서 잘 짜여 있었다. 

 가옥구조도 한국식이어서 마치 국내의 한 지방 같았다. 중국인 가옥이 몇 집 끼어 있어서 며칠 만에 한 번씩 중국 관헌이 순시를 돌 뿐 독립군의 자유무대였다. (중략) 봉오동은 대부분이 새로 지은 번듯한 가옥인 데다가 특히 상촌은 도로망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은 천연적으로 일기당천 만부부당한 요새로 된 것을 인공을 가해서 어떠한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꾸미자는 계획이었다. 마을 한쪽에는 새로 지은 목조 교사가 있었으며, 교사 앞에는 독립군의 연병장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 맏형 최진동 장군(대한군무도독부 총사령관), 사진 오른쪽은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레닌이 선물한 군복과 모자를 착용하고 권총을 앞에 걸고 기념 촬영한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오른쪽)  

 

최운산 장군은 만주 지역 군벌이었던 장쭤린(張作霖) 휘하에서 군사훈련 책임자로 활동했는데, 장쭤린 부대에서의 군대 운용 경험을 바탕으로 무장독립군 양성기관인 '봉오동사관학교'를 창립했고, 1912년부터 운영하던 자위대를 1919년 '대한군무도독부'로 개칭하고, 맏형이었던 최진동(1883~1941)은 총사령관(부장), 본인은 자금지원과 무기 구입을 책임진 참모장, 동생인 최치흥(1891~1954)은 참모를 맡았다. 할아버지 삼형제가 이끈 대한군무도독부는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청현 봉오동에서 안무(1883~1924)의 국민회군과 통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한 뒤 한경세의 대한신민단 등 여러 독립군 단체가 힘을 합쳐 대규모 일본군 토벌 부대를 대파하고 승리한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최운산 장군은 '대한민국'의 군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름을 '대한군무도독부'로 지었다는 것이다. 당시 군무도독부의 규모는 670여 명이었고, 1912년부터 러시아에서 구입한 무기들로 완전무장한 상태였다. 대한민국 군대의 첫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봉오동 전투 직전에 기록된 일제 외무성 문서를 보면 '독립군이 봉오동에서 미싱 8대로 군복을 만들고 있다, 1000명이 넘게 산에서 기숙하며 세력을 과시한다'는 구절이 있다. 당시 봉오동 전투에 참전했던 만주 독립군의 실상이 우리의 상상과는 달랐음을 짐작케하는 이야기다. 봉오동 전투는 기적이 아닌 준비된 승리였다. 잘 준비된 위대한 독립전쟁이 몇몇 영웅적인 인물에 의한 기적 같은 승리로 비치는 것에 아쉬움이 크다. 

 

197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김승학 『한국독립사』에 보면 “大韓軍務都督府(대한군무도독부)는 3.1독립선언 후 일어난 단체로서 본부를 왕청현 석현(봉오동)에 두고 최진동(일명 명록) 삼형제가 주동이 되어 활동한 단체이다. 독립군 오백여 명 장총 오백여 정을 갖고 있었으며 군복은 중국군인 복색과 같은 회색을 착용하였으므로 중국 군인과 구별하기 곤란하였다.”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후 역사 연구에서 이들의 업적이 사라졌다.

 

▲ 항일투쟁 숨은 주역 최운산 장군   

 

기: 최운산 장군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분이신가? 

최: 최운산 장군는 연변 도태(연변에 살던 조선인들을 다스리던 관리)였던 부친 최우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무예와 사격술 등을 연마하며 두각을 나타내셨다고 한다. 

 

중국 만주 지역의 북양군벌계열의 봉계군벌이자 정치가인 장쭤린(1873~1928) 부대에서 군사훈련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전투에서 장쭤린의 목숨을 구해주며 신뢰를 다지고, 군대 운영 경험을 쌓아 1912년부터 봉오동 사병 부대를 창설해 무장군인들을 훈련 양성을 했다. 1915년에 봉오동에 연병장을 만들고 막사를 짓고 독립군들과 함께 대규모 기지를 건설했다. 1919년에 임시정부가 생기면서 임시정부를 받아들이고 본인의 사병 부대를 대한민국의 첫 군대라고 할 수 있는 대한군무도독부로 자연스럽게 전환시켰던 분이셨다. 일제 문서에도 ‘대한군무도독부는 670명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 청산리전투 후 기념 촬영이라고 알려진 완전무장한 독립군 사진으로 최성주 선생은 만주의 독립군이 무기와 군복을 갖춘 정식 군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진이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명길(明吉), 문무(文武), 만익(萬益), 풍(豊), 빈(斌), 고려(高麗), 복(福) 등 여러 이명(異名)을 갖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일본군의 눈을 속이자면 변장은 필수였다. 어릴 때는 최명길, 장쭤린 군벌에 있을 땐 중국식의 최풍, 간도 제1의 거부로서 경제활동을 할 때는 최만익, 무장투쟁을 할 때는 최문무·최빈·최운산을 사용했고,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매할 때는 최고려, 중국 장사꾼으로 위장해 첩보활동을 할 때도 최운산을 사용했다. 8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모두 한 사람이다. 

 

에피소드를 하나 이야기 하자면 2008년 당시 국가보훈처가 '최문무'라는 인물에 대해 애국장(4등급)을 수여하며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했다. 중국 옌벤(延邊)에 살고 있는 후손까지 확인해 유족연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데 한 방송사에서 최문무의 후손을 인터뷰했는데 ‘할아버지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잘 모른다, 나는 국가보훈처와 역사학자가 인정해 준 사람이다’라고 했다. 후손이라면 선조의 역사는 모르더라도 무언가 들은 이야기라도 있었을 텐데... 

 

할아버지 사격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20년 초부터 대한군무도독부는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50명~200명의 독립군이 함경북도 회령, 온성군 풍리동, 풍교동, 남양동을 비롯 수십 군데 경찰서와 헌병대를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때 최운산 장군이 직접 50명~2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뛰어난 사격술로 전화선을 명중시켜 연락을 두절케 한 전과(戰果)가 일본군의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최운산 「연보」) 

 

할아버지께서는 연해주에서 자유시참변을 겪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무장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전투, 나자구전투, 대황구전투, 도문대안전투, 안산리전투, 대전자령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다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장남 최봉우(일명 최치영·1922~2001)가 학도병 징집을 피해 고향 봉오동으로 돌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평양에 정착했다. 아들이 피신한 다음 할아버지도 잡혀가 고문을 당했다. 풀려나자마자 아들이 있는 평양으로 몸을 피했던 최운산 장군은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 40일 전인 1945년 7월5일 평양에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1924년~1926년 3년간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1937년엔 보천보전투 배후로, 1939년 일본 경찰서 습격과 군자금 모집, 창씨개명 거부 등으로 10개월간, 1945년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순국하기까지 일생동안 모두 6번 옥고를 치렀는데, 매번 심하게 고문을 당해 수레에 실려 나오곤 했다. 가족들도 그가 언제 감옥에 갔다 왔는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렇게 일생 동안 쉴 새 없이 굴곡을 겪으면서도 최운산 장군은 끝까지 무장투쟁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이 군자금 등 여러가지 많은 것들이 필요했을 텐데, 어떻게 마련했나? 

최: 당시 봉오동의 독립군은 대규모의 인원과 신식 무기, 깨끗한 군복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였다. 최운산 장군은 간도 제일의 거부였다. 부산의 6배 정도 되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계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콩기름공장부터 시작해서 국수공장, 양조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등 정말 다양한 생필품 기업을 운영한 재벌 사업가였다. 그뿐 아니라 농산물과 소를 러시아에 납품한 대러시아 무역업자이기도 했다. 소를 팔러갈 때면 한 번에 300~400마리씩 몰고 가서 넘기셨다고 했다. 무역업에 종사한 인맥으로 러시아에서 무기를 지속적으로 구입해올 수 있었고 나중에 체코군에게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충분한 재정과 외교력 덕분에 대량의 신식 무기 구입이 가능했던 것 같다. 그래서 봉오동 전투 당시에 우리 군대 전체는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다. 

 

▲ 봉오동전투 위치도. 큰 화살표 근처가 독립군과 일본군과의 전투 현장  

 

기: 당시 독립군은 막강했던 일본군을 이겼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최: 많은 분들이 홍범도 장군이 총을 잘 쏴서라고 이야기 하신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총 한방으로 승리했다는 것은 군대의 사기가 충천했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우리 군대는 일본군을 이길 만큼의 인력과 무기, 작전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승리의 삼박자를 모두 갖추었다. 일본군이 습격을 한다는 정보를 미리 습득해 봉오동에 있는 주민들을 피신시켜 마을을 텅 비게 하고, 봉오동으로 유인하는 유인전술을 썼다. 일본군이 쳐들어오기 보름 전에 봉오동 산에 매복을 위한 참호를 파는 등 준비가 완전히 끝나 있었다. 제가 그 참호를 가 봤는데 그 당시 독립군들이 봉오동 산 위에 각 연대별로 주둔하면서 참호 속에서 일본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리할 수밖에 없는 준비된 작전이었다.

 

“봉오동전쟁 전황 촬영사진 3매, 상해를 보낼 예정. 별지 전쟁 촬영 사진 3매는 제2남지방의 박준재씨가 전쟁 당시 실시 전황을 보고 촬영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로 보내서 석판으로 인쇄하여 세계에 선전하려는 것인데 보신 뒤에 반송하기 바란다.”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府將 최진동이 국민회에 보낸 공문 (기안104) 

 

봉오동전투 당시 최운산 장군은 전문 사진사를 고용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로 보내서 신문에 인쇄해서 세계에 선전한 뒤 다시 대한북로독군부로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한 봉오동 독립전쟁을 실제로 촬영한 전투 사진은 봉오동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기: 최운산 장군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에피소드가 있다고 들었다? 

최: 1960년에 서훈 작업이 처음 진행될 때 아버지가 서훈 신청을 하셨다. 1961년에 서훈 심사를 통과했다고 총무처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가 나가셨을 때 총무처 담당자가 서훈을 조건으로 뒷돈을 요구했다. 아버지께서 모욕감에 참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주먹을 휘둘렀는데 그 사람이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서훈이 취소된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사료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독립군들의 인우 보증을 토대로 서훈신청서를 내고 할머니 김성녀 여사가 진정서를 내는 노력 끝에, 1977년 최운산에게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후이다. 이후 1990년 애족장(5등급)으로 격상됐다. 아버지께서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 같이 독립운동한 동생 대한북로독군부 참모 최치홍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있다. 

 

▲ 김성녀 여사

기: 할머니이신 김성녀 여사는 어떤 분인가? 

최: 할머니 김성녀 여사는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아내로 7남매의 어머니였고, 든든한 동지요 전우였다. 김성녀 여사는 최운산 장군과 혼인을 하면서 이미 한 명의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먼저 내어주는 남편의 선택에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지거나 훼방을 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평생 당신의 몫을 충실히 살아내셨다. 그런 할머니께서 가끔 불만을 표하신 것이 할아버지께서 군자금을 보내고 성금을 내어놓는 일 뿐 아니라 군대 운영의 모든 일에 형님인 최진동 장군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그림자처럼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 마다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며 "내 일이 곧 형님의 일이요. 나는 아무래도 괜찮소" 하고 답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경단부터 대한북로독군부까지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장정들을 먹이고 입히는 큰살림을 모두 책임지셨다. 최운산 3형제가 대한군무도독부와 대규모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하면서 온 집안이 군사기지가 되었을 때도 엄청난 규모의 독립군들 뒷바라지를 적극적으로 해내신 분이다. 

 

봉오동전투를 바로 앞두고 할아버지께서 집에 계시지 않을 때 도착한 중요한 정보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어 직접 산속의 본진으로 올라가 정보를 전달했고, 군사들이 없을 때 집으로 쳐들어 온 마적들을 향해 직접 총을 쏘고 일꾼들을 독려해 무장 강도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할머니는 독립군의 숫자가 정말 많았다고 했다. 재봉틀을 여러 대 마련해 군복을 지었고, 매번 어마어마한 규모의 식사준비를 해야 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당신이 한 끼에 최고로 많이 밥을 해먹인 독립군의 숫자가 3000명이 넘었다고 하셨다. 군사학으로 표현하자면 김성녀 여사는 독립군 핵심 병참 책임자이셨다.

 

기: 최운산 장군의 활약이 알려지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 것(향후 과제 등)이 있다면? 

최: 그 동안 역사가들의 연구가 깊어지면 언젠가 역사가 놓쳤던 진실들이 기록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래서 오히려 시민운동을 열심히 해 왔다. 만주 무장독립 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나도 역사는 바로잡히지 않았다.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후손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접 일제 문서를 찾고, 봉오동 전투와 최운산 장군의 삶을 역사학자들에게 전했다. 학자들은 반가워하면서 학술적 재조명이 필요한 일이니 기념사업회를 설립하라고 조언해 주셨고,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고자 뜻이 맞는 분들을 중심으로 2016년 최운산장군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최진동ㆍ최운산 장군에 대한 자료가 틀린 게 너무 많다. 봉오동 전투가 후대에 전승되는 역사가 될 수 있도록 학계가 더 많이 연구하고 철저히 고증해 주길 바란다. 당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이 됐고 그들이 모두 힘을 합쳐 철저한 준비를 거쳐 이룬 승리가 봉오동 전투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제가 60대이다. 독립전쟁의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가만히 기다린다고 사라진 역사가 되살아나지 않는다. 단순히 집안 자랑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군들이 함께 지켜낸 만주의 무장독립전쟁, 북간도에서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전하고 싶다.

 

최성주 선생과의 인터뷰는 단순히 인터뷰가 아니라 2시간 남짓 최성주 선생이 설명하는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가니 어느 새 치열한 전투 끝에 멋진 승리를 거둔 봉오동의 독립군이 되어보기도 하고, 최운산 장군이 독립군을 위해 무기를 구매하는 현장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최운산 장군을 비롯해 많은 독립군의 이야기와 봉오동 전투 속에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이, 기록된 역사에 더해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군들의 이야기가 재탄생해 주길 마음 깊이 바람해 본다(기자주)

 

-이 기사에 사용된 사진자료들은 최성주 선생으로부터 받은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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