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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을 말하다.
일제잔재 용봉정(龍鳳亭), 언제까지?
기사입력  2019/12/18 [00:13] 최종편집    김국제 대표기자
▲ 동작구에서 발표한 용봉정가족공원 조감도    

 

요양봉저정(龍驤鳳翥亭)

용양(龍驤) : ()은 용이 머리를 드는 형상, 또는 뛰노는 형상과, 봉저(鳳翥) : ()는 날아오르는 형상이 만나 용이 머리를 들고 뛰어놀며 봉황이 날아오르는 모양의 정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197252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  현재 용양봉저정 전경

 

용양봉저정은 정조(正祖)가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묻힌 화산의 현륭원으로 이동할 때 한강을 건너며 쉬어가기 위해 건립한 행궁(行宮)으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했다.

 

역사학자들은 용양봉저정의 축조연대를 1789(정조 13)이후로 보고 있는데 아마도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용양봉저정에서 그 기원을 찾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 정조실록 44권 정조 20년(1796년) 1월 26일자 기록    

 기자가 조선왕조실록 전체를 확인한 결과 조선왕조실록에는 총 7번 용양봉저정이 등장을 하는데, 처음 등장하는 것이 정조 20(1796) 126, 응교(應敎)이명연(李明淵)이 금법을 범했다는 이유로 사직하기를 청하는 대목이다.

 

정조실록 44. 계유 두 번째 기사에 따르면 이명연(李明淵)이 정조에게 [閣臣之撥站處分, 雖未知緣何事端, 曾未數時, 龍驤鳳翥亭處分, 臣又目覩矣是亭歷臨, 已有最初軍令, 則凡在近臣之列者, 宜有問安之禮相率入門, 有何所失, 而王府黜付, 景色蒼黃, 從班一空, 士女訝惑]

 

[각신(閣臣)에게 파발을 보낸 처분은 비록 무슨 사단을 인해서였는지 모르겠으나, 그 후 오래지 않아서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서의 처분을 신이 또 목도하였습니다. 이 정자에 들르신다는 것이 이미 최초의 군령이었고 보면, 무릇 근신의 열에 있는 자는 마땅히 문안하는 예가 있어야 하므로 서로 이끌고 문에 들어선 것이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의금부로 내쫓아 넘겨서 분위기가 참담해지고 따르는 반열이 텅비어버림으로써 사녀(士女)들이 모두 의혹하게 한단 말입니까?] 라고 항변하고 있고, 정조 역시 이에 대해 강한 어조로 반박하고 있는 대목이 나온다.정조가 용양봉저정에서 불충한 신하에 대한 처분을 놓고 이명연이 맞서며 반박하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이렇듯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실록 44권에 용양봉저정이 처음 등장한 이후 정조 총 3,현종 총 2, 고종 총 2회 가 등장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고종실록 4권 고종 4(1867) 912일자에 기록된 남한산성의 행궁에서 환궁하는 길에 잠시 용양봉저정에 들렀다는 내용을 끝으로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은 더 이상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 『朝鮮風景人俗寫眞帖』(日韓書房·日之出商行·海市商會, 1911) 1911년 흑석동 방면의 언덕 위에서 멀리 한강 철교와 노들섬 일대의 전경을 담아낸 사진이다. 사진의 중간과 오른쪽에 걸쳐 굴뚝이 보이는 지점까지 인천 수도수원지(仁川 水道水源池)이며, 그 오른쪽으로 언덕에 용양봉저정이 보인다. 

    

▲ 조금 더 확대한 모습 - 용양봉저정이 확실하게 보인다.    

 

이 후 잠시 잊혀져 있던 용양봉저정은 1908년 유길준(兪吉濬)에 의해 다시 한번 역사에 등장한다. 구 한말 내무대신이었던 유길준(兪吉濬)이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용양봉저정 자택에서 4년제 사립 보통학교인 은로학교(현 은로초등학교)를 세운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유길준은 어떻게 신하가 감히 왕이 머물던 처소에 머물수 있겠는가라며 용양봉저정에 거처를 정하지 않고 별관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유길준은 이곳에서 1914930일 눈을 감는다.

 

▲ 유길준 사망 직후인 1915년 은로학교(은로초등학교 전신) 모습    

 

유길준이 사망한 이후 경영의 어려움을 겪던 이곳은 이후 일본인 이케다 나가지로(池田長次朗)가 사들이면서 다시 한번 역사에 등장을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왕의 행궁인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 아닌 요릿집 용봉정(龍鳳亭)과 용봉정온천(龍鳳亭溫泉)이라는 이름으로 그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이다.

▲  대경성사진첩속에 나타나는 용봉정온천 모습과 설명

 

 1937년 중앙정보선만지사(中央情報鮮滿支社)에서 발행한 대경성사진첩(大京城寫眞帖)상의 설명을 보면 [용봉정은 1932년 개업하였는데 주인 이케다 나가지로(池田長次朗 : 사진첩 설명에는 江田長次郞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 표기된 것임)가 정조 때 조성된 유적인 용양봉저정을 중심으로 더 확장, 5,300여평의 지역에 유원지 시설(온천, 무도장, 식당, 운동장, 꽃밭 등)을 추가하여 거대한 환락장소를 만들었고, 요리 료칸과 대중목욕탕을 시간제 대여 방식으로 운영하여 고객들의 호평을 얻었다고 한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경성 최고의 위락시설 이었던 것이다.

 

또한 1938년 제국대관사(帝國大觀社)에서 펴낸 약진조선대관(躍進朝鮮大觀)에 보면 용봉정온천 전경이라는 표현과 함께 조금은 더 선명한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 『躍進朝鮮大觀』(帝國大觀社, 1938) 경성부 노량진 유원지 용봉정온천(龍鳳亭溫泉)의 광고에 포함된 사진이다. 사진 속 언덕 위의 건물이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다.    

 

▲ 이케다는 용양봉저정 좌측을 훼손한 후 이곳에 온천,무도장,식당,운동장,꽃밭 등 위락시설을 만들었다.  

 

사진을 보면, 우측에는 오늘날과 같은 용양봉저정 건물이 보이고 왼쪽으로 온천장, 무도장, 운동장 등 유원지 시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인 이케다는 이곳을 훼손해 요릿집과 함께 가족공원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와관련 놀랍게도 1936년 4월 2일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낸다.
“일면, 용의 장강을 앞에 두고 멀리 백악을 바라보니 만호장안(萬戶長安)을 한눈에 거두니 어제까지도 근교의 명승지로 높았거니와 새로 된 서울명승으로 몸이 요정(料亭)에 팔린 이 정자야말로 머지않은 날에 탕자음부의 등상을 받게 될 신세를 생각하면 일지에 지효(至孝)의 성군(聖君)을 모시던 옛날의 회억(回憶)이 다시금 새로울 것이다.”

 

용양봉저정이 용봉정으로 변한것에 대한 울분이 느껴지는 기사가 아닌가?물론 해방과 함께 왼쪽에 조성되었던 온천장,무도장, 운동장 등은 모두 철거 되었고 국가 소유가 되었다.

 

한 때 이곳은 본동사무소(본동작은도서관)가 들어서 있었으나 현재는 철거되고 용봉정가족공원 공사가 진행중에 있다. 일본인 이케다 나가지로가 조선 행궁을 비하하며 붙였던 용봉정이라는 부끄러운 지명은 그대로 사용될 예정인 것이다.

▲ 1954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고고부에 의해 작성된[용봉정보호관리에관한건] 문서   

 일본인들이 부르던 용봉정이라는 이름은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고고부에 의해 작성된 [용봉정보호관리에관한건]을 시작으로 1971년 문화재관리국 유형문화재1과에서 작성한 [용봉정설계승인]에 관한 건에 이르기 까지 그대로 사용되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게 된다.

 

마치 일본인 목화영에 별장을 만들고 풍경이 하도 좋아 명수대라고 붙인 이름이 최근까지도 불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의해서 고착화되어 버린 용봉정이라는 지명은 마치 용양봉저정의 별칭인 것처럼 알려지면서 각종 자료에도 버젓이 사용되고 있어 하루 빨리 수정해야 할 부분이다.

   그 뿐이 아니다. 일본인 이케다에 의해 용양봉저정이 훼손되며 가족위락장으로 전락을 했던 용봉정온천이라는 지명은 광복 75주년이 되는 해에 동작구에 의해 다시금 용봉정가족공원의 탄생을 예고하며 더욱 공고히 그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 1958년도의 노량진본동 전경 사진 하단에 용양봉저정의 모습이 보이고 우측 상단에 본동초등학교 건물이 보인다.(출처 국가기록원)    

 

[용봉정가족공원]이라는 이름이 시사하고 있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친일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던 우리 근세사와 함께, 역사에 무지하면 어떤일이 일어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조선시대 한시에도 용봉정에 배를 띄운다는 시가 있을 정도로 용봉정이라는 지명이 일반인들에게 사용되어져 왔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해도 되지 않느냐고.......혹은 일반인들이 그리 부르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고......

▲ 일제시대의 용봉정온천(좌)과 2020년 탄생할 용봉정가족공원(우)    

 

하지만 조선 역사 어디에도 용봉정이라고 사용된 기록은 없다. 용양봉저정 일대가 용봉정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32년 이케다에 의해 용봉정 위락타운이 생겨나면서 부터이고, 광복과 함께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무관심한 정부에 의해 고착화된 이름일 뿐이다.

 

참고로 조선의 궁궐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불린지 77년만인 1986 다시 제 이름을 찾았다. 명수대초등학교, 명수대교회 등으로 불리던 일제 잔재도 명수대 아파트를 끝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용봉정은 망령처럼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 동작구청 홈페이에 소개되고 있는 용봉정근린공원 (동작구청 홈페이지 캡쳐)    

 

광복 75주년, 동작구탄생 40주년을 맞이하는 2020년을 맞아 동작구에서 야심차게 마련하고 있는 용봉정근린공원(龍鳳亭公園)과 용봉정가족공원이라는 명칭은 동작구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일제의 잔재로, 하루 빨리 그 뿌리까지 뽑아내야 하는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지금 동작구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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