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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만큼이나 시리도록 가슴 아픈 호국보훈의 달
대한민국전몰군경미망인회 동작구지회 김화주 지회장 인터뷰
기사입력  2019/05/30 [11:49] 최종편집    노정애 기자

 

해마다 6월이면 푸른 하늘만큼이나 시리도록 가슴이 아픈 사람들이 있다. 바로 전몰군경미망인들이다. 전쟁터에 직접 참여도 안했고, 국가의 임무를 직접 수행하지 않았지만 마음 놓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꽁꽁 감싸 두고 누군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고개를 돌리며 눈물부터 훔친다. 남겨진 사람이라는 무거운 무게에 소리 죽이며 최선을 다해 살아온 이 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나라사랑의 길을 걷고 있는 분들이 아닐까?

  

동작뉴스에서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1969년 남편 순직 후 4남매 훌륭히 키워냈고, 2012년에는 국가보훈처에서 제정한 장한어머니상을 수상한 대한민국전몰군경미망인회 동작구지회 김화주 지회장을 만나 삶으로 느껴온 호국보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대한민국전몰군경미망인회 동작구지회 김화주 지회장  

Q.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호국보훈이 갖는 의미 혹은 정신은 어떤 것일까요? 

A.보훈이 갖는 궁극적인 목적은 국가를 위해 희생 헌신한 분들을 기억하면서 국민들이 호국정신으로 하나가 되어 이런 희생과 헌신이 헛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을 굳건히 지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평화통일의 기반을 다지는데 있는 것 같아요. 이것이 호국보훈의 정신이라고 생각하고 국민이 가져야 할 도리가 아닌가 해요.

 

Q. '보훈의 의미’를 국민들이 되새겨야 하는 이유는? 

A.보훈이란 사전적 의미로 '공훈에 보답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보훈이란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위해 전쟁에서, 직무수행 중 목숨을 걸었던 모든 분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국가나 국민들이 공을 세운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목숨과 젊음을 바쳐 헌신한 호국충정들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것 그것이 바로 보훈 아닐까요? 

 

Q. 미망인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A. 6·25전쟁과 월남전 참전으로 전사하거나 부상당해 전역한 군인, 경찰·소방공무원으로 직무수행 가운데 사망 혹은 부상한 용사들의 아내로 전몰군경, 순직군경, 전상군경, 공상군경의 미망인들이 모여 순국자의 유지를 이어가며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기 위해 모인 단체예요.  

 

Q. 회장님의 이야기를 잠깐 해 주신다면.... 

A. 다들 그런 것처럼 열심히 살아온 것 밖에 없어요.(김화주 지회장은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면 묻지 말아달라고 늘 이야기 했는데 이날 기자는 굳이 또 질문을 했다.) 남편은 1969년, 훈련 중에 순직했어요. 큰딸이 초등학교 4학년이었어요. 둘째가 3학년, 셋째가 1학년, 그리고 젖먹이까지 저와 함께 아이 넷만 덩그러니 남겨졌죠. 지금도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 당시에는 더 힘들었어요. 

 

▲  그 때 그 시절

아이들 넷과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막막한 가운데 시내버스 입금원 일자리를 제안받았어요. 그런데 현금을 다루는 직업인지라 재정보증인이 필요했었죠. 아이들을 위해 일을 시작해야 했지만 저는 무남독녀였고, 시아버지는 남편만 데리고 월남한 분이라 선뜻 보증을 서 주겠다는 사람들은 없었죠. 원망보다는 절망감에 하지 말아야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이들 손을 잡고 한강으로 향했었어요. 

 

한참 울면서 큰 딸에게 물었죠? '그냥 우리 여기서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딸이 울면서 그러더군요. ‘엄마! 아빠만 살아 있었다면 엄마가 이렇게 힘들지 않았겠지? 아빠 만나러 가자' 그 소리가 가슴을 파헤치듯 아팠어요. 그렇게 또 한참을 울었어요. 그런데 셋째 딸이 제 손을 잡아끌더니 '나중에 법관이 돼서 엄마같이 어려운 사람없게 할 테니 죽지 말자'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집으로 돌아와 잠든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남편을 생각했죠. 그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어요.

 

하늘이 도왔는지 가끔 왕래하고 지내던 당시 서울학원 원장이 보증을 서 줬고, 저는 회사에 입사했어요. 그렇지만 격일제 근무에 버스 막차 시간을 기다렸다 임금액을 정산해야 하는 일이라 밤을 꼬박 새기도 했고, 쉬는 날에는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남대문시장으로, 길거리로 나섰어요.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 살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직장에다, 행상에다 쉼 없이 뛰며 일하다보니 아이들과 연락도 안 닿는 상황에서 길거리에서 쓰러져 병원에서 만 하루가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던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보석같은 아이들이 있었기에 잘 견뎌 냈어요. 내 삶의 원동력이예요. 

 

한번은 둘째 딸이 중학교에 다니면서 엄마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신발 밑창이 다 떨어졌는데도 라면박스를 오려 바닥에 대고 그 위에 비닐을 씌워 신고 다녔었어요. 그 사실을 졸업식에서 알게 되었어요. 어찌나 마음이 아팠던지, 그 때 딸이 그러더군요. 곧 새학년이 시작되는데 그 때 사 달라고. 

 

지금은 장성한 아이들과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고 있어요. 며느리, 사위 모두 제 아들, 딸이예요. 마음 아프게도 얼마 전에 소중한 아들이 제 가슴에 남아버렸답니다. 

 

 

Q. 회원들이 대부분 고령이시다. 회원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A. 고령이다 보니 몸이 아픈 회원이 많아 걱정이예요. 보훈병원이 있지만 어르신들이 오가기도 불편하고 시간도 많이 걸려요. 지금 동작구에서 보훈지정병원이 있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데 의료지원혜택이 현재 75세로 되어있어요. 65세 이상으로 바뀌어 더 많은 회원들이 진료를 받을 수 있다면 바랄게 없겠어요. 

 

Q. 미망인회에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A. 국가에서 혹은 지자체에서 회원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제 아이들 다 잘 키웠고 연금도 나오고 생활하면 되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이 너무 많아요. 나라도 이제 어느 정도 잘 살잖아요. 조금 더 미망인들에 대한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어요. 

 

Q. 안타까울 때는 언제인가? 

A. 학생들이 보훈회관 앞을 지나가면서도 뭐하는 곳인지도 몰라요. 미망인회도 6·25전쟁과 월남전쟁 피해자들로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인데 역사가 잊혀지면 안 되잖아요. 슬픈 역사일지라도. 

 

제가 아이들 키우며 먹고 사느라 힘들던 와중에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가 그리워요. 그래서 저는 미망인회의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을 어머니라고 불러요. 친정어머니에게 잘해드리지 못해 새로운 어머니들을 보살피려 노력해요. 

 

Q. 바라는 것이 있다면? 

A. 부디 하늘에 있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건강하게 사는 거예요. 그래야 어머니(미망인)들을 모시고 제가 지금 누리는 행복을 나눌 수 있으니까요. 

 

김화주 지회장은 오늘도 회원들에게 전화를 한다. 조금이라도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면 누구보다 먼저 찾아간다. 좋은 것이 있고, 좋은 곳을 구경 할 일이 생기면 거동이 가능한 연로한 회원들을 생각한다. 세월이 더 지나가기 전에 행복한 기억들을 많이 만들었으면 하는 김화주 지회장의 마음이다.  6월 호국보훈의 달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친 국가유공자들과 남편을 잃었지만 자식들을 키우며 또 하나의 나라사랑을 실천해 온 미망인들의 가슴시린 사연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기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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